카테고리 없음

수필-세월아, 내 자식 살려내라

윤재영 2014. 4. 22. 04:29

세월아, 내 자식 살려내라

 

          윤재영


세상은 세월호에 묻혀 숨을 죽이고 있다. 비는 이렇게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며 화창한 날씨는 그렇게 무심하단 말인가. 이것저것 싫다. 자식 살려내라.

자식을 위해 무엇을 못하겠는가. 권투 경기를 하다 얻어맞는 것을 보고 엄마는 냅다 뛰어 올라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상대방을 마구 때렸다. 자식이 차에 깔리자 번쩍 들어 올려 구해냈다. 어떻게 기른 자식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 깜깜하고 차디찬 바닷물 속에 갇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건만 아무것도 없어 바라보고만 있어야만 하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고 입에서 거품이 나오고 눈이 뒤집어진다. 얼굴이라도 보고 따뜻하게 안아라도 보고 싶다. 언젠가 죽어야 운명이라지만 아들아 딸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사랑하는 이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비닐 속에 묶여 나오고 있는데 필요 없다. 자식 살려내라. 분통과 원망을 어떻게 해야 있단 말인가. 없는 교사들이 단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당신이 던지는 손가락질과 눈총을 맞으면 되겠는가. 구조되어 살아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목숨을 끊어 불에 태워 재를 바다에 뿌리면 되겠는가. 나는 학생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좋다. 하지만 단어에 막중한 책임이 담겨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겁이 덜컥 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학생을 위해 죽을 있어야 하는데 나는 과연 그렇게 있을까?

이번 참사로 단체 수학여행을 없애야 한다는 언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사실 선생님들도 편할 같다. 하지만 학창 시절 단체로 다녔던 여행은 잊을 없는 추억이었다. 아이가 다칠까 학교에는 어떻게 보내겠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세월의 흐름에 현실도 따라간다는데 무슨 수로 역류할 있겠는가마는 단지 너무 극단적으로 기울어져 공익에 피해 또는 손해를 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어떠한 위로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백여 명의 잠수사가 차가운 속에서 분투하고 있고 오천 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밤낮으로 작업하는 공로는 아픔에 묻힐 것이다. 책임과 원망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극도로 민감한 이때 혹시 누구에게 뉘가 되는 것은 아닌지 글을 쓴다는 것이 조심스럽다. 발을 펴고 잠을 자기도 그렇고 농담을 하고 웃기가 그렇고 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조차 편안하지 않다.

하필 슬픔의 현장에서 웃는 것이 방송을 네티즌으로부터 몰매를 맞는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고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가정을 지켜야 하는 가장일 수도 있다. 사람이라도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만큼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다. 제자를 살려낸 선생님, 동료에게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 남을 위해 자기의 삶을 버린 사람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더는 사람을 죽일 없고 죽은 사람을 죽일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힘든 때를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양이 되신 것이 아니었던가.

부활절 아침 성당에 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구두를 놓고 남편과 아들 사이에 티각퇴각 말싸움이 벌어졌다. 아이가 아버지 것을 신고 나갔다가 엉망으로 놓고 닦아 놓지 않았나 보다. 자식이 속에서 생사를 모르는데, “지금,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누군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한 준비는 달이지만 죽는 준비는 평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알고는 잊지만 죽을 것처럼 남의 일인 것처럼 잊고 살고 있다. 사랑하는 이를 보낸 일가친척의 비통함을 일분 함께하며 가르침을 주고 그들에게 빚을 마음으로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다. 모든 모임에서 그러하듯 이번 여성문학회도 기도하고 시작했다.

엄마는 언제까지 침몰한 세월을 향해 자식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오열해야 하는가 




윤재영 4월 19일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