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고향은 부모님의 살과 뼈, 그리고 피다
/박세문(창작과 의식 발행인, 시인)
『고향』이란, 우리 모두에게 무형의 전재산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의 생명을 재배하여 세월이란 들판에
쟁점화시키는 게 이가 치루는 현장성 내지 결과물인 것이다. 결국, 시인의 삶은 고향을 정점으로 아침을 시작해서 저녁을 마감하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이는 시인의 몸에 흡인력있는 갈증의 해소를 위하여 물보다 흡수가 빠른 고향이라는 자음과 모음을 한사코 찾아내기에 이른 경우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곳은 어제도 아니고 물론 내일도 아닌 오늘이라 하는 상황에 명시화 되어 있다.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라는 단순히
현상의 사각지대에 사로잡혀 있다해도 크게 지나치 않으리라. 그러나 존재의 본능과 욕구는 생산을 목적으로 간주할 때, 오늘과 현재라는 동일시한
현상의 구조적 체제는 과감히 묵살될 수 밖에 없다. 이는 미래와 과거로 환원되기 위한 도구적인 충전과 대안일 수 밖에 없노라고 시인의 작품
세계에 발을 디디면서 얻게 되는 직관과 능독적인 결론이다. 추구하는 시의 희망적인 도달은 광범위한 어제이상의 기억과 추억을 재생산한 함축론이며,
궁극적으로는 이를 토대로 삶의 투명한 모티브로의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의 주변에 풍경화 된 소품들은 고향의 언어로 무수히 존재한다.
담벽 한 모퉁이
흙 먼지 날리는
수줍은 듯 소박한
노란 꽃가로등
그리운 모정인가
보고픈 임인가
어두울 새라,
밝혀주고 반겨준다
오늘도
만나고픈 설레임있어
그 길을
찾는다
-작품 '꽃 등' 전문-
담벽에 걸려 있는 꽃등을 어둠이란 막연한 기억으로 운동시켜 밝기에 서식시키고 과거
현재 미래의 시차를 극복하여 일원화된 우주를 만들어 이의 바탕위에 무한한 사고를 분출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녀의 바탕은 실체와 구체성 짙은
산물도 형이상학적 고향으로서 토대를 이룬다. 무엇보다 그리운 모정은 앞으로 고향을 탐구 내지는 인식하므로서 독자에게 또는 자신에게 무형의
전재산으로서 다시 한 번 환원시킬 몫으로 충분하고 타당하다는 단서가 성립된다. 우선 시인의 집 마른벽 꼭대기에 걸어둔 꽃등의 밝기에 파문이 일기
시작하므로 고향의 기억을 차름차츰 더듬어 나가도록 한다.
멀리 시집간 딸이 왔다고
골목이 떠들썩하다
제비 새끼 화들짝 거린다
낯이 익을 때도 되었건만
파리 떼 도둑고양이 조용하다
어머니 단단히 주의를 주셨나
보다
울 밑의 하얀 봉선화 부러움 사고
붉은 선인장 오늘 내일 만삭이란다
어머니 성화에
늦잠자던
화초들 고개 내밀고
-작품 '마중' 전문-
그랬다 날마다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셨다. 서리가 내린 문밖까지 고무신
끌끌 차고 나와 새벽보다 더 새벽다운 서리처럼 서성이던 우리 어머니의 이름은 당연히 고향이라는 명사였고 우물아래 손등과 이마가득 주름잡힌 감나무
한 그루였다. 또한 그녀의 이름은 명사가 아닌, 동사와 심지어는 형용사로서의 빼어난 굴곡이셨다. 기다리는 집이 있어, 어머니가 계시어 고향이
존재하므로 시인은 날마다 그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언제나 삶의 현장은 어둡다의 규칙적 형용사가 변질된 고딕체의 명사다. 이는 몸을 고정시키고
본질적 욕구를 감퇴시키면서 생의 본능을 둔화시키기에 이른다. 어머니가 몸과 생각안에 세포의 조직으로 균열하지 않았다면 어둡다의 형용사는 부활을
꿈꾸기 힘들었으리라. 과정을 되풀이 하는 건, 시간의 짐작일 뿐이다. 아침과 저녁을 통과하는 무의식적 시간의 행보는 과연 인간의 뇌조직을 얼마나
꿰뚫고 들어가 사고를 늙지 않게하고 병들지 않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인간의 무한한 사고와 정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이 세월의
가늠이다. 시인의 고유한 삶의 양식은 어머니와 고향이라는 재료로 빚어지기에 이른다. 오늘의 담벽에 꽃등을 내어 걸고 날마다 어제로 걸어 가기를
원하고 그 곳에서 내일을 위한 고향의 자료들을 수집한다. 먼지가 짙은 기억의 창고를 열고 들어가 시인의 주름진 고향 한 자락 한 자락 펼쳐
나가는 언어의 다림질 솜씨를 이제부터 우리는 새겨 볼 만 하다. 이는 시인의 연인인 것처럼 길을 같이 찾아 나서는 동행의 역할로서 의미하도록
한다.
어느듯,
저 세상의 문이 열려
공중에 떠올라 한 바퀴 돌고는
아무일도 없었던 냥
다시 몸을 빌어 부시시 눈을 뜬다
여기가 어딘가
내 집인가 네 집인가
고향인가 타향인가
-작품
'시차' 중에서-
시인의 작품은 어떠한 형식이나 능숙한 전문인의 글쓰기가 아닌 언어 다루기에 있어 누구나 소통이 가능한 감성과
인성의 어휘력으로 독자를 설득하기에 이른다. 입증과 타당성의 제시를 목적으로 하는 다른 갈래의 글쓰기와 달리 지극히 내것만을 전달해도 전달
받은자와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이 시의 견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시는 내것만으로도 대상의 본질과 원초적 자아까지 건드려 객관화시키고
설득력있는, 보다 범위가 넓은 재생산적인 글쓰기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막연하고 모호 할수록 공간적 개념은 더 확대된다고 보는데, 이는
규명된 시간적 관념을 과감히 탈피 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고 공간의 개념안에서 시인은 충분한 몰입과 최면의 상태를 유지해야 바탕이 확대될 수
있다. 시인의 시를 가만히 관찰하면 고향의 마당 한 가운데 삽질로 훼손되지 않은 봉선화나 백일홍처럼 집을 떠나지 않아 순박한 유년의 시인을
자연스럽게 목격하게 되는 경우다. 그만큼 시인은 고향을 단순히 그리워 한 것만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현상을 배고 들어가 아예 고향이라는 공간안에
눌러 앉아 돌이킨 세월만큼 다시 살아내기에 이른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의 삶을 예견하고 고향집 댓돌과 마루조차 뜯어 고치지 않았다.
자식을 위하여 그대로 보관한 선견지명의 대가다. 돌아와 보니 파리떼 도둑고양이조차 어머니는 그들의 삶조차 수정하지 않은 채 였다. 무섭고 험악한
세상에 내보내어 뺏고 빼앗기는 집단의 논리에 고통당하지 않도록 어머니의 치마폭에 가만히 앉아있게 한 예다. 수정되지 않은 고향, 고향을 그대로
빼다 박은 어머니를 만나고 어찌 시인은 세상과 현실에 능숙능란한 자태로 예속될 수 있었겠는가. 표면과 실제는 엄연히 구분 되는것, 세상은 그렇게
단순히 표지에 속하고 고향은 그 안의 진실이라는 고집으로 차곡차곡 담기어 항아리속 장맛처럼 냄새를 풍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기르던 품안의
자식인 화초와 고양이는 늘 어머니의 만만한 잔소리에 귀가 무디어져 있었으리라. 오랜만에 집을 찾은 시인에게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화색이
만연하다. 당분간이라도 멀리 달아나지 않으려 한다. 잠자코 고향의 마당을 베고 누워 인위적인 진술은 하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를 흉내내어
두런거리듯 때론 홍시감 하나 목에 잠기듯 침이 고인 목소리가 된다. 그보다 좀 더 큰소리로 도둑고양이를 불렀나 보다. 마루 밑으로 후다닥
달아나는 고양이는 어딘지 얄미운 구석이 있는 놈이야 라고 궁시렁궁시렁 대는 푸념이 이곳까지 들리는 법하다.
시인은 멀리 산다.
어찌보면 지구의 시작에서 끝까지 거리가 한국이라는 나라와 미국이고 그 거리는 언제부턴가 세계화란 정치성 동질감을 부르짖기도 했으나 아직도
우리에겐 와 닿지 않는 서로간의 정서에 사로잡혀 있다. 환경과 정서는 물론 생태학적으로도 욕구가 다르듯이 동서양의 차이는 어딘지 극복 안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곳을 떠난지 무려 이십오륙년은 족히 된다고 하니 그들의 옷이 알맞은 상태로 결코
부자연스럽지만 않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것은 생을 보류 시키지 못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의 도모일 뿐, 위에서도 말했듯이 정신이 양육되어 지는
것은 시인의 경우, 특히 어머니와 고향이 전부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시인의 삶은 그래서 전부 고향의 살과 피로 얼룩져 있다. 가슴가득 차
오르는 낱말들은 고향집 마당에서 같이 크고 살던, 비록 일그러지고 부서졌으나 세련되지 않은 물건들의 이름이다. 그들의 낱말 하나하나는 이제 몸의
구성원인 뼈가 되어 정신을 통치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영혼은 찬연한 봄날 벚꽃같은 눈물로 젖어 있는 것이다. 아름답다, 다시 고향 산천에 그녀의
영혼이 벚꽃가루처럼 흩날리어 언어가 되고 시가 된다. 감히 산 아래 나무그늘을 닮아 있어 그녀의 시는 때때로 침묵하듯 무겁기도 하다.
벌 나비 놀러 온다
어머니 집 앞마당 가운데
손때 묻은 돌로 둘러진 꽃밭에
화초, 잡초, 야채, 나무
이름도 직위도 다 필요없단다
자리 잡는 사람이 임자란다
이 곳에 있는 이상
작품 '꽃밭' 중에서-
누가 그녀의 뿌리를 뽑아다 공중에 이양 시켰는가, 물도 공기도 낯설다 그래서 입을 다문다.
상처는 그대로 피지 못하고 멍울되어 가슴에 남긴다. 눈치채지 못하는 수동적인 삶의 인식은 관계를 위한 생활의 중력일 뿐, 진정으로 날개를
준비하는 시인이다. 꿈의 문을 열어 지금의 내 집을 개조해나가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뿌리의 방황을 멈추기 위한 시인의 도발이고 반란이라 볼 수
있다. 원래의 내 집은 이제 네 집이고 개조했던 내 집은 이제 뿌리를 제대로 키워 줄 고향집이다. 당당하게 그녀와 혈연관계를 맺기에 이르러
해묵은 기억을 녹인다. 모두가 잠든 밤이라서 더 좋은가 이제, 꿈의 문은 열려 있고 언어의 식탁은 유전의 법칙에 의해서 가시와 살기가 없는 땅의
말들로 충분하기에 이른다. 우리를 키워 온 땅과 어머니의 집은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햇빛과 바람만으로 저린 세월을 치유하고 그래서 익힌
양식을 자식의 입에 골고루 넣어줄 뿐 결코, 무수한 말들로 지시하고 훈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인은 어려서 부터 말하기 보다는 이렇게 찾아가
만지고 부비면서 애정을 표현하는 법을 익혔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마음으로 다가가 끌어안기고 사랑하기다. 한 순간이 아닌 영원으로의 꿈은
그들이 되고픈 삶의 이미지로 탄생되고 몰입으로 인한 형상화 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도둑이 담을 넘지 못하게 만든 경계의
차원으로 표시한 금이 아닌 사립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립안으로 첫 발을 놓는 순간 어머니의 입김과 숨소리는 아무런 경고도 엄포도 내지 않고
다만, 알속같이 따뜻 할 뿐이다. 잔잔한 파동이 일면서 사립문 밖의 경고로 부터 질서되지 않아도 좋을 자유로 이제 부터는 풀려나는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의 집엔 예나 지금이나 이땅의 모든 생명의 촉수들이 똑같은 대접을 받아가며 자유를 품고 누리고 있단 말인가. 어머니가 뿌려주는
양식을 취하고 이들의 표정과 마음의 온기는 너 나 할 것없이 여름오기전 오월의 싱싱한 햇살정도인듯 하다. 어머니는 이들의 나고 자람을 일일히
기록하여 다시 생의 양식으로 저축한 하신단다. 그래서 굴절되지 않는 삶을 영위토록 알맞은 햇빛과 비와 같은 심연의 언어로 기도하듯 몸을 닦아주고
뿌리를 밟아 가족이라는 신뢰로 토닥이기에 이른다.
어머니가 바로 시인이셨다. 그가 적어가는 시는 모두 품어 안고 토닥이는 물질
이상의 세계가 존재한다. 자식이 먼 나라로 떠나기 이십몇년전 지붕 및 처마엔 제비집이 있었다. 마루만 올라서면 어깨위로 쏟아지던 제비똥이
짜증나서 매일 어머니를 붙들고 치워버리자고 성화였는데 그 때의 어머니만큼 나이가 되서 돌아오니 아직도 어머니는 그들의 뒤치닥거리에 여념이
없으셨다. 세상의 이치와는 무관한 삶으로 그들의 어머니 노릇을 일삼고 계셨던 것이다. 그들에게서 인생의 진리를 배운다. 어찌보면 어머니는 몸소
시를 풀어냈고 실천으로 자식에게 인생을 배우도록 이른 철학의 깊은 세월 순례자다. 이제는 잘 펴진 옷 매무새위로 툭 하고 떨어진 제비똥이
더럽거나 추하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가 어린시절 아픈 상처에 발라준 고약같이 정답고 코끝이 찡하다.
분주한 거리 한
모퉁이에
뜨거운 눈길 주시는
연세도 잊으신 노할머니
“호박 사, 집에서 따온 거야”
누런 쟁반 위에
가지런한 호박덩이
귀한 물건보여주듯 다독이신다
커피 한 잔 값인 것을
여행길에 짐만 되기에 망설인다
돈만
받으시라 하고 싶으나
할머니 땀방울에 누가 될 것 같다
주시는 대로 받기로 했다
까만 봉지에 할머니의 진실된 삶을
정당한 댓가로
-작품 '호박 사세요' 전문-
외출은 이유를 막론하고 설레임과 호기심이다. 얼마간 뒷전이었던
인연이거나 추억쌓기에 어지간히 동참했던 소품과 장소를 다시 찾아가 보는 일은 첫사랑을 떠올리는 것 이상 무엇에 견주랴. 회귀는 다시 반환점을
돌아 과거와 역사를 역행하는 것이다. 찾아가 보니 유년이란 추억의 버팀목이 고향의 언어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대상이 오감에
익숙하거나 그래서 막연히 그리워했던 어떠한 실체들을 만나는거라면 감동과 공감의 기대치는 한층 생산적이리라 본다. 무엇이 있었을까 경춘선 기찻길을
지나면서 한여름 깨꽃같이 웃어주던 머스마와 수건을 둘러쓰고 들판만한 밭을 끝없이 매던 아주머니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옛날처럼 우리보다 잔소리
많던 잡초들의 재잘거림을 만나는 거란다. 만나는 것에 대한 연습과 약속이 없었어도 이들은 전부 나의 태도에 낯섦을 품지 않는다. 이유는
당분간이라도 고향을 전제로 언어의 관습이 긴밀감을 주어 그들과 소통이 가능해 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인의 외출은 사뭇 어릴적 이웃과의 해후다.
장터 좌판에 앉은 할머니의 호박은 요긴한 먹거리는 아니나 세상의 차가운 이치에 단련된 가슴이 따뜻하게 녹아져 내리는 감성의 계기고 때로는 각자의
삶에서 치루는 노역이 강한 통증으로 어떠한 의미가 같았을 것이란 생각에 가슴또한 찡하다. 할머니가 호박을 팔기 위하여 장만한 누런쟁반은 도구를
빛내기 위한 할머니의 마음의 표출인 것이다. 분주한 거리와 누런쟁반, 그리고 호박은 그녀가 그려내는 우주(쟁반)위의 중심(호박)일 것이다. 어찌
외면 할 수 있었으랴, 시인은 짐이 될 지 모를 호박을 기꺼이 사서 챙겨 안는다. 호박으로 인하여 자신의 이러한 감성이 할머니에게 그대로
전이되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다. 이러한 유형의 배경이나 맥락으로 이어진 작품안엔 자신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유년에서 보고 익혔던 대상들이 역할
설정이 되고 자림매김 하기에 이른다. 시인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다. 다시 머물자리로 돌아왔으나 마음의 봇짐안에는 어머니가 들어있고
고향이 고스란히 인절미처럼 쫄깃하니 들어있어 하루 세 번 이상은 식사를 하듯 음미와 기록으로 추억과 그리움의 허기를 달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어머니와 고향과의 식사는 나를 이루기 위한 내면화다. 다시 말하면, 나는 어머니로서 비롯된 성질의 생명의 인식이므로 그처럼 말하고 진정 그가
되어 숨소리를 내는 일이다. 어느때 부터인가 간절했던 그 무엇은 고향으로의 회귀고 어머니의 무릎에 나를 누이게 하는 거였다. 그것은 시인의
감정이 어머니의 가슴에 전이되고 이입되어 어머니로서 부활되기를 꿈꾸는 것이었으리라. 고향에 머무는 동안 추억의 해설자로서 고향 체험에 동반이
가능했던 -호박사세요- 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