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된 원고

엄마의 일기

윤재영 2012. 11. 3. 02:13

 

 

 

 

 

* 책으로 엮으며


    어머니 올해 팔순의 연세로 결혼 60주년을 기념하신다. 74세부터 78
세까지 5년에 걸쳐 깨알 같은 글씨체로 적어 놓으신 일기와 틈만 있으면
들려주시던 일제치하의 시대와 육이오 전쟁, 그리고 지난 이야기를 단면
화 시켜 다듬고 정리하여 구슬을 꿰어 드린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일기장을 보면 술술 외워 적어 놓으신 시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지나온 세월의 풍파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흙탕물이 흘러가야만 맑은 물이 되듯 세월 따라 흘러가며 걸러진
어머니의 삶, 어느 한 여인의 삶은 바로 나의 삶이었다. 단지 달구지
타던 시절에서 제트기 타는 시절이 되었다는 것이 조금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꽃밭에 봉숭아는 작년에도 피었고 올해도 피고
내년에도 필 것이다.
    어머니는 늘 일기를 써오셨다. 내가 대학교 2학년, 한창 어머니 삶에
대해 비판할 때였다. 어느 날 다락에 올라가 우연히 낡은 일기장을 발견
했다. 당시 오빠가 두 살 되었을 때 장사를 하시며 적어 놓으신 글이었
다. 돈이 하나도 없는데 배가 고픈 아들은 눈치도 없이 떡을 사달라고
떼를 쓰고 울자, 한대 때려 주며 집에 데리고 올 때 그 아픈 마음을
글로서 옮겨 놓으신 것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자국이 있는 그 일기를
읽고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 후로
어머니의 잔소리와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한 모습 뒷면에는 세월
의 그늘에서 피지 못한 여인의 한이 서려있었고 거센 파도 속에 살아남
기 위해서 자식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조차 사치인 각박하고도 처절
한 삶이 있었던 거다.
    살만한 시절을 맞이하자 하늘 같이 믿고 의지하던 자식을 가슴에 묻어
야했던 어머니는 바람처럼 지나가는 세월은 열두 고개 아리랑에 비유하
셨다. 처마 밑 제비새끼 날아가고 텅 빈 집의 적적한 나날 속에 그래도
집 안에 꽃밭이 있고 담벼락 아래 한 뼘 가량의 텃밭이 있다. 자식들의
손때가 묻은 것으로 도배를 하고, 하물며 방안에 들어오는 개미새끼마저
친구가 되어 생활한 삶은 자연의 동영상이 아닐 수 없다.
    "쓸 데 없는 짓 하지마라"
    책 내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시는 어머니, 왜 안 그러시겠는가.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을 속내, 그 깊은 삶을 표현한다
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겠지만 인생은 미완성이라 했듯 어느 선에
서 마침이 있어야 하겠기에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또 다른 한이 되어
영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할 수 있어"
     어머니가 강하게 가슴 속에 심어주신 말이다. 힘에 겹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 이 말이 되살아난다. 우리 선조들이 역경을 이겨냈듯 어머니도
그렇게 고비 고비 살아남으신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나의
삶은 내 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꿈을 현실화시키고 다음 세대에 버팀목
이 되어 주어야 하는 책임감마저 생긴다.
    말 못할 고독 속에 맺히고 맺혔던 한 여인의 외침이, 아니 그 세대를
살아오신 모든 어머니의 한이 하얀 홀씨 되어 바람타고 공중에 흩어진
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 세대는 물론, 다음 세대가 파란 하늘을
보고 자유롭게 숨을 쉬고 뛰어놀 수 있는 거다. 수 천 년 내려오는 세월에
비하면 어머니와 나의 만남은 티끌보다 짧고 반딧불보다 작은 것이겠지
만 그녀가 겪은 애환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눈물겹도록 감사할
뿐이다.
    2012년 6월 4일
    딸 윤재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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