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된 원고

시집 "샘물" 제 1 장

윤재영 2015. 8. 31. 16:50

 

 

샘물

 

 

//윤재영

퐁퐁 솟아오르는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무더운 여름, 외할머니

딸랑딸랑 워낭소리에

송글송글 땀방울 물방울

꽈리 틀어 머리에 이고

찰랑찰랑 길어다

여름을 말아 주셨다

 

 

함지박으로 철철 넘치게

물을 퍼 올리던 그 곳에서

생수를 마셨다

 

 

 

 

제1장 딸기를 따며

 

 

딸기를 따며

세월

달밤 나그네

어떤 사람

주객이 전도되어

“빨간 머리 앤”

꽃나무의 독백

나는 지금

배추를 씻으며

또 태웠다

약육강식

세월이 내린다

이별통보

등굣길

초록

약속

삶의 열매

후회

낮 달맞이 꽃

마음 연습

 

 

 

 

 

 

딸기따며

 

 

 

땡볕에 빨갛게 익은

대지의 땀방울

한끝 멋을 낸 자연의 잔치

같은 모양이나 제각기 다르다

 

 

잘 보아야 한다

앞은 탐스럽게 익었지만

뒤는 썩은 것도 있다

크고 작고 예쁘고 밉고

그 안에도 희로애락이 있었다

 

 

 

딸기를 따다 그만

딸기가 되어버렸다

 

 

 

 

 

세월

 

 

 

지난 밤 하늘

초승달 예리한 미소가

심상치 않더라 했더니

 

 

엊그제 왔다는데

어느새 간단다

아침상 치우지도 않았는데

 

 

잠투정하는 오후

잠시 기다리라 달래 놓고

보낼 준비를 한다

 

 

챙길 것은 챙겼는지

아쉬움이 있다마는

우리 최선을 다했다하자

 

 

 

 

 

 

달밤 나그네

 

 

 

적막한 가을밤 청청 벌판에

저 멀리 반짝이는 별 하나 믿고

홀로 떠나는 달밤 나그네

 

 

쉬어가라고 붙들고 싶으나

처지가 그보다 못한지라

애잔히 바라보는 여심 하나

 

 

무슨 사연 있었기에

스산한 바람 옷깃여미고

희미한 벌레소리 눈물짓고 있나

 

 

 

 

 

 

어떤 사람

 

 

 

 

나서면 안 된다

그늘에서 살아야 한다

찍소리 하다간 잡힌다

구설수에 올라서도 안 된다

눈에 띄면 무조건

구멍으로 들어가야 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태어났다

 

 

고독은 고독을

외로움은 외로움을

먹고 살아야 하나보다

누가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는 거다

 

 

그들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내가 듣기 싫은 것이지

 

 

 

 

 

 

주객전도되어

 

 

 

 

무심코 달리는 한적한 길

깜짝 놀란 청솔모 한 마리

 

 

속도를 줄이며

지나가길 기다리건만

내기를 하자는 건지

안내를 하려는지

인내심을 보려는지

바로 앞에서 깡총깡총

 

 

“빵!”

갈팡질팡, 결국

나온 길로 후다닥 되돌아간다

 

 

 

주객이 전도 되었지만

어찌하랴

나도 길을 가야하는 것을

 

 

 

 

 

 

“빨간 머리 앤”

 

 

바깥세상 구경나온

순수한 호기심은

울퉁불퉁 가시밭길이었다

 

 

가지 말아야 하는

샛길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후회하지 않으리라

 

 

한 번은 거쳐 가야 했기에

삶의 가치를 알았기에

그들의 아픔을 느꼈기에

 

 

 

 

 

꽃나무독백

 

 

 

 

떠오르는 생각을

한 움큼 꽃밭에 심어

싹을 틔운다

 

 

봐 주는 사람 없어도

비바람에 지칠지라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싶다

 

 

꽃이라 불러줄

그 한 사람을 위해

다녀갔다는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다

 

 

 

 

 

나는 지금

 

 

바람한 점 없는

친정집 마당 같은

햇살 고운 뜨락에서

꽃향기 맡으며

홀로 거닐고 있다

 

 

넓디넓은 밤하늘

은실금실 반짝이는

그대의 미소 닮은

저 별이 내별인가

 

 

달콤한 사과를

따 먹지 않았더라면

혼자만 먹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오랜 기다림 끝에

노란 개나리 수선화

활짝 피었건만, 내 마음

짙은 안개 미로 속에서

무엇이 급한지

커다란 지구 타고

우주를 떠돌고 있다

 

 

한 번 가버리면

기약 없는 세월이기에

스치는 임의 모습

아쉽기만 하다

 

 

 

 

 

 

배추씻으며

 

 

 

초록 사이사이 진딧물

촘촘히 달라 붙어있다

움직이지는 않으나 살아있음이다

분명 심장이 뛰고 있을 거다

 

 

무감각해지자

흙이 묻었다 생각하자

세차게 씻어내고

종일 소금물에 넣어 두었다

이파리 하나하나

정밀 검사에 들어간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이 있으리라

그리고 증언하리라, 만천하에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또 태웠다

 

 

 

팥죽을 쑬까

팥소를 만들까

깨끗이 씻어 밤새 불려 놓고

불에 올려놓는다

열어보고 또 열어보나

아직 덜 익었다

 

 

깜빡한 사이

씁쓰름한 냄새가 난다

탔다. 아주 눌어붙었다

팥알도 아깝지만

닦아야 할 냄비가 걱정이다

긁어내고 닦아내며

한나절을 만들어 먹었다

 

 

 

 

 

약육강식

 

 

 

한 줌밖에 안 되는 그가

날카로운 이빨로

허연 뼈가 들어나도록 물어뜯었다

 

 

한 번 당하고 나니

꿈속에서라도 볼까봐 겁난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들부들 떨려

슬금슬금 꽁지가 내려간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세월내린다

 

 

 

머리에 피부에 온 몸에

주룩주룩 세월이 내린다

 

 

세찬 바람에 흔들리고 싶지 않다

아니, 잔바람에도 무릎을 꿇으리라

가슴 깊이 박힌 잡초를 뽑아야한다

아니, 그들조차 사랑으로 감싸 주리라

 

 

하늘나라 임이 계신 곳

그 목소리 듣고 만져보고 싶기에

 

 

 

 

 

 

 

봄비에 최면이 걸려

누런 밭에서 갓 뽑아 낸

지난 날 달콤한 추억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우리 함께 하자고 했었지

 

 

자근자근 썰어

온갖 반찬에 다 들어가도

생색을 내지 않는

약방의 감초

네가 없는 주방은

향기 없는 꽃이리라

 

 

 

 

이별 통보

 

 

 

말 한마디 툭 던져놓고

가버리면 어쩌시나요

그렇게 하기까지

뒤얽힌 사연은

얼마나 많았겠는지요

 

 

이것저것 못해 준 것이

마음에 걸리는 군요

받아야 할 아픔이라면 달게 받지요

그 매듭 풀어 보내주세요

우리 다시 만나 웃을 수 있게

 

 

 

등굣길

아침마다 정확한 그 시간에

학교 앞 사거리 좌회전 우회전

내 차례 네 차례

잘 들 알아서 착착 이뤄진다

강이 바다로 가듯

학생들은 학교로

앞뒤 빼곡히 사방팔방에서

흘러들어 온다

 

 

순서를 기다리는 차들의 행렬

주춤주춤 하더니만

한 알 한 알, 때론 두 세알

쏙 낳고 가버린다

 

 

 

 

 

초록

 

 

 

초록이 여름을 만나

세상이 온통 초록이다

 

 

그토록 바랐던 것이건만

왜 허전 한 건가

꽃잎이 그리운 건가

부족한 한 개가 생각나서 인가

 

 

채워지지 않는 잔을 채울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약속

 

 

 

미적지근 후덥한 바람

유월을 갉아 먹고

쨍쨍 뙤약볕 가뭄 끝

뜨거운 대지에 떨어지는

빗방울 전야제

 

 

누런 이파리 그늘 아래

아기 호박 통통히 살 오르고

개미떼 부지런히 움직인다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 도장 찍고

낼 모래 꼭 오마했는가?

 

 

 

 

 

열매

 

 

 

밤 새 얼마나 컸나

눈을 뜨면서 텃밭에 나간다

이른 아침인가 했더니

벌들이 먼저 나와 있다

 

 

수도꼭지 틀어 주니

벌컥벌컥 들이 마신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그들이 크는 재미에

언제부턴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보고 또 보아도 신기한

삶의 열매 하늘의 예술품

그렇게 기다리면 되는 것을

 

 

 

 

후회

 

 

 

이파리 무성하고

꽃도 피었건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섭섭한 마음에

애꿎은 세상 탓하며

쓸어내리는 가슴

 

 

덜렁 씨앗만 뿌려놓고

싹만 틔어 놓으면

저절로 크는 줄 알았다

 

 

가려운데 긁어 주고

때가 되면 따끔하게

가지를 쳐 주어야 하는 것을

 

 

 

 

낮 달맞이 꽃

 

 

 

한적한 시골 들길을 가다

너를 처음 보는 순간

발그레 수줍은 미소에

그만 흠모하게 되었다

 

 

언젠간 만날 수 있으리라

 년이 흐른 지금

가까이 있으나

재촉하는 시간에 못 이겨

돌아서야 하는 얄궂은 인연이여

마음 연습

 

 

 

남의 것을 가지고

마치 내 것인 냥 살고 있다

있고 없고 잘나고 못나고

의미를 두는 것은 나다

결국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것을

 

 

진리를 분별하고

빛으로 마음을 채우고 싶다

밤에도 환하게 불 밝히는

운동을 하다보면 튼튼해지듯

연습하다보면 언젠간

번뜩 깨우침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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