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된 원고

시집 "샘물" 제 2 장

윤재영 2015. 8. 31. 16:56

 

시시프스(Sisyphus)

 

 

시시프스의 바위는

산 정상을 눈앞에 두면

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부서져 조각난 의지를

주섬주섬 주워 맞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결과보다 과정이라 하지 않았나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한 삶을 다하고 있는 거다

 

 

 

 

 

 

 

낚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니

싱싱한 물고기들 노닐고 있다

 

 

그 중에 몇몇이

아는체 입질을 한다

눈을 뜨면 다 사라질 것들

얼른 건져 대충 손질해

컴퓨터에 저장해 둔다

 

 

한 잠 자고 일어나

튀기고 굽고 조리고

맛나게 한 상 차려놓으리라

 

 

 

 

 

 

눈깔사탕

 

 

어릴 적 어머니가

책가방을 등에 메워주시며

일원을 손에 쥐어 주셨다

 

 

학교 앞 구멍가게

눈깔사탕 하나 물고

오물오물 논둑 밭둑

언덕 넘어 행길 건너

집에 돌아오는 길

긴긴 거리가 멀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것

그렇게 많다마는

이제는 그 맛이 나지 않는다

부유 속에 빈곤이다

 

 

 

 

 

 

 

아름다운 것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잔디 위에 맺힌 이슬이

 

 

들 가에 핀

잔잔한 꽃들과

주렁주렁 달린 열매가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청청한 밤하늘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와

둥근 달님의 미소가

 

 

그리고 천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장터

 

 

 

뽀얗게 단장하고

발걸음 가볍게 집을 나선다

 

 

휘휘 둘러 구경하며

질겅질겅 멍이야 장이야

부딪치는 혼란 속에서

이걸 살까 저걸 살까

어디서 살까

눈으로 재다가 한 나절 다 간다

힐끗 하늘이 보내는 눈짓에

찔끔 머리를 조아린다

 

 

장바구니에 하나 가득

낑낑 사온 것은 많은데

먹을 것이 없다

 

 

 

 

 

 

 

미안하다

 

 

 

잘 하려다 그만 아프게 했다

맛있게 해 주려다 태워 버렸고

예쁘게 해 주려다 싹둑 잘라버렸다

 

 

그렇게 너는 자라 이제

홀로 가는 인생길 어차피

무거운 짐 버려야 하는 것을

탓할 것 무엇이고

원망할 것 무엇이랴

넓디넓은 우주 속에

너와 나의 인연은

소멸해야 할 크나큰 업이었을까

 

 

미안하다 용서해라

늦게 철이 든 마음 하나

네게 딸려 보낸다

 

 

 

 

 

 

 

경적

 

 

 

깊은 밤

새벽을 뚫고 들려오는

생명의 외침

 

 

어디로 가는지

가슴 속 깊이 얽힌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려

그리움이 있는 그곳으로

혼자 가야 하는 길

 

 

때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라

한 줄기 빛을 따라

어머니 부르며

달려가는 돌아온 탕자여

 

 

 

 

 

 

 

스쳐간 인연

 

 

 

산 속에서 개 한 마리

터덕터덕 걸어간다

 

 

자유에 지쳤나

버려진 건가. 아니면

주인이 애타게 찾고 있을까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인연

애써 눈을 돌린 사이

불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가버렸다

 

 

어디를 가든지 잘 살거라

 

 

 

 

 

 

 

 

밤송이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에

까칠한 밤송이가

가을을 그립게 한다

 

 

할 말은 없지만

영근 대대손손

키득키득 웃음소리 듣고프다

 

 

땅에 떨어진 밤송이

줍고 싶으나 그냥 지나간다

체면 때문이라 하자

 

 

 

 

 

 

 

인생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누군가에 의지하고 싶었다

 

 

환상은 깨져 동댕이쳐지고

제자리로 돌아와

멍든 가슴 추스린다

 

 

깨질 것도 아플 것도 없는

그 것은 내 안에 길이었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그게 아닐 거다

 

 

 

곱게 차려입은 나뭇잎

조바심하는 걸 보니

가을 빗발 다녀갔나 보다

 

 

주인이 없는 사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나

오해가 꼬리를 물어

중부난방 새끼를 친다

 

 

그게 아닐 거다

집착은 중독이고

중독은 병이다

애써 한 생각 내려놓는다

 

 

 

 

 

 

 

시월 마지막 날

 

 

 

현실에 묻혀

올해는 그냥 보내려 했는데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 없다고

쓸쓸함은 생각에서 온다고

겨우 진정시켜 놓았는데

계절은 어느새 다가와

고독을 부른다

한여름 열기 속에도

굳건했던 짙푸름이건만

늦은 바람에 훤히 드러난 속내

눈부신 햇살 아래

자신을 불사른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바탕 벌어지는 춤사위는

더욱 외롭기만 한 것을

 

 

 

 

 

 

 

가을에게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좋아서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예고된 운명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눈도 귀도 다 막았었다

 

 

그대가 떠나가는 뒤안길

황홀했던 것만큼

아파야 했던 이별의 슬픔에

남몰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세월이 지나 다시 찾아주는 그대

내심 반가우나 연연치 않으리라

올 테면 오고 갈 테면 가고, 이미

내 안에서 들어와 살고 있기에

 

 

 

 

 

 

 

삼월 일일

 

 

 

소복소복 눈이 온다

 

 

누구의 아픔 있어

하얗게 보이는 지

선혈이 낭자했던 그 비극을

재잘재잘 새들은

알고 있는지

 

 

한 맺힌 푸른 하늘

살아서 숨 쉬게 하리라

허기진 외침 시린 발끝

잊히지 않도록

가슴 깊은 곳에

삼월의 꽃을 피우리라

 

 

 

 

 

 

 

 

 

본색

 

 

 

 

현기증 나는 가을단풍

본색을 드러낸다

 

 

온 세상이 들썩거림에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가 했더니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눈 깜짝 한 사이

천지가 바뀌었다

 

 

하늘을 가르며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는

고기잡이 뱃고동이었다

 

 

 

 

 

 

 

 

 

혼자 내리는 비

 

 

 

 

 

가을비 혼자

쓸쓸하게 내리는 날

 

 

흐릿한 등불 아래

떠오르는 생각의 부산물

일단 걸러 놓으면

뇌혈관에서 연락이 와

자판을 두드린다

 

 

하얀 공간에 까만 생명이

살아나 꿈틀거린다

 

 

 

 

 

 

 

히커리 열매

 

 

 

앞뜰에 아름드리 히커리 나무

한 여름에 뙤약볕을 막아 주지만

골칫거리 열매 우르르 떨어진다

 

 

두꺼운 껍데기 속 알맹이는

내 안의 아집이었다

너무 깊은 곳에 박혀있어

있는지도 몰랐다

 

 

딱딱할수록

깨지는 아픔이 더 큰가보다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더 깨져야 하나

 

 

 

 

 

 

 

 

거울

 

 

 

손끝의 가시는

빼내면 된다지만

싫은 사람 하나는

까맣게 내 속을 태운다

 

 

혼자 잘났고

허영과 욕심이 가득한 그는

나의 거울이었다

그는 바뀌지 않는다

내가 바뀌는 수밖에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비추려는지

 

 

 

 

 

 

 

 

불협화음

 

 

 

새소리 곱다지만

짹짹 지지배배

아침이 시끄럽다

딱따구리 한 술 더 뜬다

 

 

왜 들 그러나

청솔모가 귀찮게 구나. 아니다

모이통이 비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채워 주시던

옆집 할머니 돌아가셨다

 

 

떼로 몰려 와

서로 먹자 달려드니

우리 집 새들 텃세하는 거다

 

 

 

 

 

 

 

 

가져가거라

 

 

 

 

얼마까지 버틸 수 있을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그래, 주자

내 것이 아닌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잠시 착각하고 있었다

 

 

빼앗기는 게 아니라

거저 받은 것을 돌려주는 거다

 

 

 

 

 

 

 

축가

 

 

 

소중한 인연으로 만나

삶의 여정을 함께하는 고귀한 순간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힘이 되어주고 버팀목이 되어 주어

밝은 햇살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도록

튼튼한 뿌리를 내리소서

 

 

좋은 땅에 심어진 씨앗

정성껏 물을 주며 가꾸어

하루하루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영원한 사랑의 불꽃을 피우소서

 

 

사랑은 나눔을 통해 완성된다 하더이다

둘의 만남이 완전한 하나가 되어

열배, 백배, 아니, 태산도 옮길 힘을 엮어내어

세상 구원을 위한 알찬 열매를 맺으소서

 

 

 

 

 

 

 

 

아프지 말자

 

 

 

몸살인가 감기인가

목이 칼칼하다

코끝으로 올라가더니

콧물이 흐르고 팔다리 쑤신다

머리가 터질듯 아프니

세상이 다 귀찮다

 

 

마음이 아플 때

몸이 아픈 게 차라니 낫다고

큰 소리쳤건만

몸이 아프니 마음은 염두에도 없다

 

 

마음은 한 생각을 바꾸면 된다지만

몸은 보살펴 주어야 한다

푹푹 닭국을 고아 한 그릇 먹고

한잠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으려나

 

 

우리 아프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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