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하며

아픈 곳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프다

윤재영 2007. 9. 7. 13:16

아픈 곳은 살짝 건드려도 아프다

 

 

야간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대부분은 흑인과 백인 여자 직장인이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삼십대 초반이 되는 백인 남자가 사람이 등록했다. 수업에 들어와서 인사 대신 교실이 바뀐 것에 대해 불평부터 늘어 놓았다.

 

대화에 참여도 하지도 않고 조용히 앉자 있어서 처음에는 여자들만 있어서 멋쩍어서 그런 알고 그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농담을 했다. 남들 웃는데 진작에 웃어야 할 그는 웃지않았다. 그리고는 웃지 말아야 곳에서 빈정거리듯 피식 웃는 것이었다. 따끔하게 한마디 주어야 하는 건데, 처음부터 화를 낼 수가 없었기에 순간을 놓쳤다.

 

이후 차례나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했지만 모르는 척하고 그냥 지나갔다. 동양인 여자한테서 배워야 한다는 그의 자존심일까?  학생이 아무리 그래 보았자 손해 보는 것은 학생이다.  

 

생각 끝에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개인적인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수업에 집중할 없어서 그랬다고 변명을 하며 신경을 써주어서 고맙다고 정중하게 답글을 보내왔다. 그래서 괜찮아졌나 했더니, 오히려 심하게 시선을 피했고, 강의 도중에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숙제를 내지도 않는 것이 마치 내게 반항이라도 하는 같았다. 어쩔 없이 나도 그가 없다고 생각하며 부담스럽게 강의를 나갔다.

 

어느 , 아동의 정신집중 장애를 주제로 토론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관심을 보이더니, 자기도 정신집중 장애아였다 하는 거였다. 과거 정신집중 장애아로서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에게 도움이 있는 조언 것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줄줄이 말을 이었다. 촛점을 벗어 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입을 것이 고마웠다.

 

성적이 나빠 학교에서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았고, 반항아가 되어 군인학교로 보내져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고 했다. 그랬었다. 학교란 그에게 지겨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부정적 태도에는 뿌리가 있었던 거다.

 

그의 말을 들으며 그의 아픔을 보았고 그를 이해할 있었다. 그를 알고 나니, 그가 이상 겁나지 않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게임에 빨려 들어 힘들었었다. 선생의 욕심은 학생이 잘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가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 마음아픈 일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을 존중해 거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주는 것도 그의 인생에서 가르침이 것이다.  아픈 곳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픈 것이다.  한동안 우중충했던 구름이 걷히듯 마음이 가벼워진다.

 

 

 

2007년 9월 6일

윤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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