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된 원고

시집 "샘물" 제 5 장

윤재영 2015. 9. 1. 12:11

 

양심

 

 

등 따시고 배부르니

눈까풀이 나른해진다

냉커피 한 모금으로

뇌리를 깨워

구부러진 생각을 편다

 

 

바다 속 용궁에

금빛 은빛 금붕어

유유히 돌아다니나

그 작은 물고기 어디로 갔나

보이지 않는다

알아서 어찌하겠나

그 내막은 난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즐기는 것이

내 몫이라 하자

 

 

아픔은 그곳에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을 뿐

 

 

 

 

 

괜찮다

 

 

헉헉 숨통 막히는 무더위

그만 두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일상을 두루 말아 놓고

제대 앞에 나아가 무릎 꿇는다

어찌하란 말인가요?

괜찮다 괜찮다

네가 속한 자리로 돌아가거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토록 더웠던 것은

그대 탓이 아니었다

인정받고 싶은 허한 마음이었다

 

 

 

 

 

시월 그리움

 

 

시월의 바람결에

둥실 떠오르는 보름달

여기저기 흩어진 구름 뒤에

살그머니

얼굴 가리나 모습 보이고

모습 감추나 옷자락 보인다

쏘옥 고개 내밀어

반겨주는 활짝 미소

아릿한 그리움 일어

여인네 가슴 설레게 한다

 

 

 

 

 

 

섬뜩!

 

 

이른 아침 창 밖

바람 없는

수많은 나뭇잎 고요하다

한숨 돌릴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 기척이 없다

숨을 쉬나 쉬나

가만히 들여다본다

 

 

섬뜩!

누리꾸리 색도 없는 마리

울타리에 올라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한 꺼풀

 

 

관습과 관념을 깨고

다른 세계를 보고 싶다

 

 

잘 보이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

태어나기 전부터

심장이 뛰듯

뇌리에 심어진 씨앗이다

한 생각만 바꾸면 된다는데

왜 고집을 쓰고 있나

 

 

아픔을 겪고 나서야

한 꺼풀 벗게 되나보다

 

 

 

 

일상

 

 

작은 움막을 쳐

불 지펴 어둠을 재우고

엉클어진 생각 다듬어 풀고

따끈한 찻잔에 곱은 손 녹이며

푹푹 생각을 고아 맛을 내고 싶다

책상에 주방에 거실에 머릿속에

내 손을 기다리는 것들, 아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느낌도 없는

마음에 쌓이는 일상의 먼지들

무엇부터 치워야 할 지 고민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감사한 것이 아닐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잘 달래가면서

굳은 몸 툭툭 털어 다시 움직인다

내가 한다 하지만 내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힘을 통해서

태엽은 돌아가고 있다

 

 

 

 

 

연륜

 

 

여름 비 다녀갔나

나무 그늘에 하얀 주름버섯

우산을 받치고 조르르 서 있다

햇살이 비추면 어디로 가려나

 

 

멍해진 뇌리 속 길들어진 삶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충실한 노예가 되어버렸다

되는대로 산다고 하지만

가슴 한구석 아릿한 공허함이다

보드란 너의 감촉이 그립다 하면

사치라 하려는가

 

 

 

 

 

사실

 

 

눈부신 태양

감히 바라보지 못하다

하얀 구름커튼에 가려서야

형체가 보인다

 

 

종일토록 몸을 사르고

붉으래 서산에 지고 있다

아니, 그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변하지도 않았다

달라진 것도 움직인 것도

바로 나였다

 

 

어둑어둑 땅거미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부지런히 집으로 가고 있다

 

 

 

 

 

 

홍관조

 

 

예쁜 만큼 의심도 많다

머리 빳빳이 세워 경계를 하다

제 풀에 놀라

호르르 날아가 버린다

 

 

이제는 터놓고 지내도 되겠건만

저만치 선을 그어 놓고

더 이상 오지 말란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아니

지나친 기대일까

먼발치서 바라만 보다

모이만 주고 자리를 비워준다

 

 

 

 

 

 

아직아니다

 

 

자그마한 옷장에

빼곡히 걸려있는 옷들

많기는 많은데 입을 게 없고

버려야 하는데 버릴게 없다

작아진 청바지,

다시 입을 수 있을 것 같고

하늘하늘 블라우스

보기만 해도 예쁘고

볼품은 없지만 브랜드이고

오래됐지만, 추억이 있고

목에 끼지만 찬바람 불까 봐

까만 드레스, 혹시 몰라서

흰 남방셔츠 몇 개 되지만

용도가 다르다

만지작거리다 다시 걸어 놓는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벌집

 

 

한 이불 덮으나

나 너를 모르고

너 나를 모른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의욕이 없는 날

괜한 벌집을 건드렸다

 

 

좋은 것 좋고

싫은 것 싫다고 했다가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온 몸에 쏘여

벌겋게 되었으나

속은 후련하다

 

 

 

 

 

무언無言으로

 

 

자업자득이라 했는가

남편이 그렇고

자식이 그렇고

나의 삶이 그렇다

 

 

고요한 밤에

홀로 떠 있는 보름달

나를 맞아 주는가

반가워 눈물이 절로 난다

 

 

생의 한 가운데에서

발버둥 치다 준 상처들

다 치유되었으면, 아니

큰 선물로 안겨주었으면

 

 

 

 

 

난파선

 

 

폭풍우 한꺼번에 내리쳐

산산조각

부서지는 알았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고

쓸려 가면 안 된다고

죽자 사자 매달렸다

 

 

어렴풋 무지개 핀다

해는 그곳에 있었다

잠시 가리었을 뿐

 

 

 

 

 

보고 싶다

 

 

해맑은 미소가

몹시도 그리운 날

하얀 달빛 그림자 지어

파란 하늘에 띄운다

 

 

붉은 노을이 지기 전

이 해가 가기 전, 아니

한 삶이 다 하기 전

그나마 가슴 깊이 연연해 온

한 톨의 불씨가 꺼지기 전

그대가 보고 싶다

 

 

 

 

 

다시 시작하는 거다

 

 

잘 살아 보려고 하다

그만 웃음을 잃었다

 

 

차가운 봄비에

메마른 나뭇가지

동면에서 깨어나듯

넘어져 깨진 무릎

긁힌 가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야 한다

 

 

그래도 눈물이 난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거다

다시 시작하는 거다

 

 

 

 

 

파도

 

 

밀려온 파도에

곱게 써 놓은 낙서들이

다 씻겨 내려간다

화려했던 것

그토록 뼈저리게 아팠던 것

슬퍼야할 같은데

마음이 평안 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가닥 햇살

꼭 붙들고 있으면 된다

 

 

 

 

하늘 놀이터

 

 

약속하지 않았지만

알았기에

보름달 밝혀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구름 속에 가려질까

한눈팔면 가버릴까

조바심하지만

여기에 있다. 있다

바로 네 곁에 그림자로

반겨주는 손짓에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을

 

 

 

 

 

 

변치 않으리

 

 

아직 날씨가 차건만

실룩 불어온 봄바람에

텃밭에 불청객 잡초들

먼저 와 자리 잡는다

 

 

무슨 잘못이 있게냐마는

손끝이 무디도록 뽑아 버렸다

이미 정해져 있는 자리라

그렇게 하는 거란다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이

자연의 이치라하면

뽑는 것 또한 그렇다 하자

 

 

하루가 무섭게 변하는 세상이나

기력이 남아 있는 한

그 마음 변하지 않으리라

 

 

 

 

 

잔영

 

 

자아가 고개를 들면

그대가 던진 돌이

잔영으로 남아

머릿속에서 파동 치다

어느새 주인이 되어

나를 가지고 논다

 

 

거울에 비추는

꼭두각시 그림자에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든다

늪 속에 빠지지 않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함이다

 

 

 

 

 

감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내 안에 투정어린 아이를 달래

졸졸 맑은 물가에서

아기자기 조약돌 줍는다

 

 

시간에 쫒기는

조급한 마음을 접고

누렇게 영근 황금 벼 이삭 위로

고추잠자리 불러와 하늘을 난다

 

 

 

 

 

 

 

에게

 

 

 

 

벌거벗은 나뭇가지

고요한 밤거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검푸른 넓디넓은 곳에

작은 반점으로 빛나는

총명한 너에게 물어본다

그곳은 어디냐고

내가 보이느냐고

 

 

그리고 전하고 싶다

긴긴 겨울밤

동무해 주는 네가 있어

쓸쓸하지 않다고

세상에 둘도 없는 신비한

너를 가슴에 품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감상문>

신선한 새벽하늘을 깃는 시인

박세문(시인)

시인의 고향은 강원도이다. 그러고 보니 10년 이상지기의 친구로, 문우로 걸어온 것이다. 고향이니 바람이니, 그리고 들꽃이니 하는 주변의 만물은 시인의 눈에서는 언제나 맑음 그 자체였다. 꽃과 바람의 감각을 기억하는 일은 시인이 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지만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부인하지 못한다. 두레박으로 우물의 물을 깃듯 시인은 새벽하늘에서 언어를 깃는 것 같다.

시인의 지론이라면, 텃밭에서 갓 따온 상추처럼 신선한 언어로, 그렇다고 특출한 언어를 빗대는 그런 행위도 볼 수 없다. 어쩌면 제호 ‘샘물’ 자체가 맑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인연에도 연관을 주는 우물의 깊이를 연상할 수 있다.

곧 닥칠 이순의 나이를 완전 무시한 채 문학에 익숙한 시인은 도시의 탁한 공기를 정화시킨지 오래다. 이미 마음은 실컷 푸르고 맑다. 파릇한 이파리를 돋우고 이를 부풀리면서 뿌리를 내리는 나무의 삶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고 타인과 교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무가 이루어 낸 신록이 나 아닌 주변의 사람들까지 만끽시킨다. 시인의 가슴 한가운데 일찌감치 문학이라는 고상한 언어를 널어놓고 바다거나 산이나, 그리고 들판으로, 넓고 깊음에서 푸름을 찾기도 한다. 이젠 섬으로 가는 길 하나를 찾는 중이다. 근래 신열을 앓으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의 무형의 사랑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힘이기에 시인은 외롭지 않다.

시집 서평을 하다보면 거의 아픔이거나 고뇌이면서 또는 그리움 등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으며, 나아가서는 끝없는 자기 구원의 긴 여로로 나타나고 있을 보지만 시인은 보이지 않는 정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공간을 열어가려고 하는 즉, 자아를 발견하는데 있다. 조용한 내면의 소유자지만 움직임에 있어서는 매우 강한 심성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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