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일기 에세이

한여름 으스스한 오후에

윤재영 2009. 8. 7. 13:03

 

 

한여름 으스스한 오후에

//윤재영

 

냉방기 팡팡 돌아간다. 없으면 없는 데로 살겠구먼, 한 번 시원한 맛을 보니 끌 수가 없다. 난 찬 바람이 싫다. 일 도 상간으로 실랑이가 벌어진다.  일 도를 높이면 남편과 애들이 덥다고 투덜거리고 일 도를 내리면 내가 추워 못 견디겠다. 하지만, 군소리를 듣느니 내가 추운 쪽이 나으리라. 찬바람이 쉴 새 없이 술술 나온다. 돈 나가는 소리. 이달 전기료는 얼마나 나오려나

편지가 올 시간이다. 핑계 삼아 밖에 나가 몸을 녹이고 와야겠다. 현관에서 우체통까지 한 오십 미터 된다. 맨발로 나간다. 햇살이 달콤하게 따시다. 그 따신 햇살도 시간이 지나면 매서운 뙤약볕이 되겠지. 시멘트 바닥이 뜨겁다. 하지만, 견딜 수 있다. 우둘투둘한 시멘트 바닥이 주는 따끈한 발마사지는 일품이다.

어쩔거나, 옆집과 경계선에 있는 큰 도토리나무에서 삼사 미터 길이의 나뭇가지가 꺾어져 공중에 매달려 있다. 옆집 뜰에 떨어질 판이다. 큰 가지 하나는 이미 옆집 뜰에 떨어져 있다. ! 예산에 없었던 돈 나가게 생겼다. 이번 주 아는 댁 아이들 공부를 가르쳐 주고 여윳돈이 생겨 너무 좋아했더니만, 내 그럴 줄 알았다. 받은 것보다 더 나가게 생겼다. 덕분에 하나 배웠다. 우리 집 나무가 부러져 옆집에 떨어지면, 그 나무가 죽은 나무가 아닌 이상 우리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대로 하면 우리가 안 치워도 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우체통에 백화점에서 보낸 쿠폰, 가을학기 강의 계약서, 그리고 누가 손수 써서 보낸 카드 그렇게 세 통이 와있다. 안 쓰는 게 버는 거라고 올해는 더는 옷 생각이 없었는데, 특별 고객이라면서 싸게 해 주겠다고 보내준 쿠폰을 보니 마음이 흔들린다. 유혹은 이렇게 달콤하게 다가왔고 난 유혹에 약하다. 가을학기 강의 계약서에 일곱 명 이상 신청하지 않으면 강의가 취소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대놓고 말은 못하겠지만 강의가 취소돼도 괜찮다. 어렵더라도 강의를 계속해서 느슨해진 머리를 다시 조여야 하겠지만, 노는데 맛을 들인 난 이제 쫓기는 삶이 싫어졌다. 되도 좋고 안돼도 좋다. 이 여유는 나이가 들어서야 누릴 수 있는 특권이리라

그건 그렇고 이 카드를 누가 보냈는지, 아무리 봐도 낯선 이름과 주소이다. 반쯤 읽어 내려가서야 알았다. 몇 달 전 결혼한 친구 딸이 아기를 낳았다고 해서 선물을 보냈는데 친구 딸이 고맙다고 보내 준 인사카드다. 아기 키우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카드만 보낸 것도 아니고, 길게 쓴 편지까지 받으니 기쁘기도 하고 친구 딸이 기특하고 신통하다. 고맙다고 답장을 써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뿐이다. 친구 딸에게 부담을 줄 수 있을 뿐더러, 사실 내가 아는 사람은 친구이지 친구의 딸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왜 아직 매미 우는소리가 안 들리는 걸까? 계절상 아직 이른 건가? 그래도 서서히 들릴 때가 되었는데 조용하다. 요사이 세상이 하도 급격하게 변하니 매미 소리 안 들린다 하여 놀랄 일도 아니겠다만, 나무가 우거진 곳에 살면서 들려야 할 소리 안 들리니 이상하다. 울어 제칠 때는 시끄럽더니만 막상 조용하니 궁금하기 짝이 없다.

올여름 텃밭에는 남편 사랑 듬뿍 받고 자란 토마토가 큰 것 작은 것 긴 것 이것저것 할 것 없이 주렁주렁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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