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일기 에세이

한 생각을 바꾸고 나니

윤재영 2011. 9. 14. 04:59

 

한 생각을 바꾸고 나니

 

 

윤재영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전주에 사는 지인을 만나고 춘천에 가려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직통버스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가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버릇처럼 자판기에서 커피를 꺼내 손에 들고 줄을 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 서 있던 누군가 “쾍…”하더니 “퉤…”하고 땅에다 가래를 뱉는 거였다. 더러웠다. 못 볼 것을 본 양 고개를 얼른 돌렸다. 하지만 몇 번이나 계속 그랬다. 사람이 밟고 다닐 생각을 하니 마치 내가 밟은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그 청년은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였고 몸이 마르고 키가 컸다. 하얀 티셔츠에 하얀 흰 바지 입고 샛노란 농구화를 신은 것이 이색적이었다. 짐도 없이 하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있는 것이 춘천엔 무슨 연유로 가는 걸까 하는 궁금증도 자아냈다.

난 먼저 버스에 올라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어 그 노란 운동화 청년이 올라탔다. ‘제발 내 근처에 앉지 마라.’ 빌었다. 다행히도 저쪽 창가로 가서 앉았다. 서너 칸 정도의 거리였지만 내 뒤쪽이라 안 보이면 잊힐 거리였다.

마음을 놓으려는 순간 그 젊은이는 “쾍쾍” 헛기침을 하며 코와 가슴에서 가래를 긁어냈다. 그만 하겠지 하고 순간을 견디고 나면 다시 “쾍쾍” 걸렸다.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그 소리에 쏠렸다. 전주에서 모처럼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을 다 토해낼 것 같았다. 병균이 스멀스멀 내 몸에 달라붙는 것 같았고 커피를 오염시킨 것 같아 마실 수도 없었다.

네 시간 동안이나 이렇게 고문을 당하며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버스를 세워 내릴까 했지만 이미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그 와중에 갑자기 저 청년은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그 청년이 내 아들이라면 그가 한 번 기침할 적마다 내 가슴이 찢어지게 아플 것이다. 다시는 그 소리에 짜증도 화도 나지 않았다. 내 입장만 생각한 것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주님, 저 청년의 고통을 덜어 주소서. 평안하게 춘천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그 후 잠에 취해 들쑥날쑥 하는 동안 버스는 어느덧 휴게소까지 왔다. 다들 내렸고 그 노란 운동화의 청년도 보였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가 기침을 안 했는지 아니면 내가 못 들었는지 전혀 의식이 없이 그냥 평온하게 온 것이었다. 버스는 다시 총착지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우연의 일치일까? 기도의 힘이었을까? 그렇게 지독하게 하던 헛기침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중충했던 날씨가 거치고 하얀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새삼 반가웠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그 청년은 지나가며 표정없는 얼굴로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알기나 하는가.” 어디론가 홀로 쓸쓸히 걸어가는 뒷 모습을 바라보며 혹시나 그는 내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주님이 보내신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뜩들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너는 얼마나 더 아프겠니?’ 그 한 생각으로 바꿈으로, 사랑하는 왕자 눈물 한 방울로 공주가 마술에서 풀려나듯 난 고통 속에서 해방되었다. 내가 행복해야 그대가 행복하고, 더 나아가 그대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감사의 노래를 불러본다. 

 

내가 홀로 괴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네…”

 

 

 

 

 

 

2011년 9월 13일

윤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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