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일기 에세이

바람부는 크리스마스이브

윤재영 2014. 12. 29. 13:32


바람 부는 크리스마스이브

 

                윤재영

 

오늘이 바로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한다. 눈이 내려야 산타가 썰매를 타고 올텐데 전날부터 천둥에 소낙비에 호우주의보까지 내렸으니 올해는 고무보트를 타고 붕어 새끼들한테 고삐를 맡겨야 모양이다. 시간이 필요한데 벌써라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산타의 마음은 심란하다. 각본대로 되어 가는지 빠진 것이 없는지 부산하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치매기인지 연륜인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결과에 느긋해지기도 한다.

우산처럼 펴기만 하면 되고 라이트까지 붙어 있는 간단 크리스마스트리가 거실 모퉁이에서 생색을 내고 있다. 그동안 모인 장식들이 박스가 되지만 올해는 아무것도 달지 않기로 했다. 조촐해서 좋다. 주렁주렁 달아야 하는 의미를 잃어버렸다. 쥐구멍에도 있다고 작년에 제자리에 들어가지 못해 굴러다니던 방울 개를 걸어 놓았더니 제법 예쁘다. 이것마저 없으면 내년에는 단출할 같다. 부풀었던 거품을 빼고 원심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음이다.

이브 저녁은 하얀 생선 구운 것과 프로기 (폴란드식 만두), 그리고 완두콩이 전부다. 명절 중에 가장 간단한 음식이다. 프로기는 시어머님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인데 남편이 아무리 음식을 잘하더라도 이것만은 나만의 영역이다. 만두 속은 으깬 감자에 커티지 치즈와 체더 치즈를 넣고 양파와 마늘 볶은 것을 넣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면 된다. 터지지 않게 만든다고 집안에서 칭찬이 자자하다. 진짜 만드는지 아니면 계속 만들라는 뜻인지 그렇게 유래가 되어 산타가 프로기를 만들지 않으면 이브에는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한다.  

일어나자마자 전날 준비해 놓은 재료로 프로기를 빚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반죽이 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때보다 밀가루 컵을 넣었는데도 그랬다. 달라붙지 않도록 범벅이 되도록 밀가루를 묻혀 놓았다. 물이 펄펄 끓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조심 넣었다. 이삼 지나 서서히 위에 떠오르면 익은 거다. 그런데 어떻게 일인지 물에 넣자마자 터진 도넛처럼 허옇게 부풀어 둥둥 떠올랐다. 익었는지 의아했지만 공식에 따라 건져냈다. 달라붙지 않게 양파 볶은 것을 발라 놓았다. 맛을 기대하며 베어 먹다가 깜짝 놀랐다. 겉은 익었지만 속은 밀가루 반죽 맛이었다.

번째 끓일 때는 속지 않고 충분히 분을 기다렸다 꺼냈다. 이번에는 너무 익었다. 물러 터지고 달라붙고 인지 겉인지 죽이 되어 버렸다. 내가 뽐낼 유일한 기회이고 이십 여년 동안 무탈이었는데 이런 변고가 생기다니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 범인은 밀가루였다. 슈퍼에서 세일을 하기에 베이킹파우더가 들어 있다는 것을 보지도 않고 널름 버린 것이다.

어쩐지 하나 나의 자랑인 와플 과자를 만드는데도 이상했다. 반죽이 부풀어 오르고 맛이 쌉싸름한 것이 베이킹파우더 맛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갈지 모르겠지만 고수는 안다. 마치 와인 전문가가 맛을 보면 어느 어느 포도로 만들었다는 것을  나 또한 오랜 경험으로 무엇이 얼마큼  들어갔는지 미묘한 맛을 구별할 있다. 분명히 적량대로 같은데 결과가 이러하니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없었다. 산타가 정신이 나가 넣었을 거로 생각했지 밀가루를 의심하지는 않았었다.

넉넉히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어 주려 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계속 만들 것인지 것인지 기로에 섰다. 갑자기 남편이 원격조정한 헬리콥터가 반죽에 추락하여 날개가 튕겨 나갔다. 그만하라는 사인이다. 미련없이 손을 놓았다. 그중에 비스무리 형태를 갖춘 변변한 개를 골라 생색을 냈다. 맛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고맙게도 군소리 없이 잘들 먹었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았자 그들이 알 리가 없다산타의 업무는 그저 주어야만 하는 거다.

 창밖에는 무정한 비가 내리고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못한 누런 나뭇잎들이 바람에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다. 오늘과 내일이 어떻게 다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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