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일기 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가벼워지는 기쁨

윤재영 2016. 6. 6. 05:46

산티아고 순례를 하며: 가벼워지는 기쁨


윤재영


20일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왔다. 이 년 한국에서 친구들을 만나 막연하게 꺼냈던 말들이 현실로 되었다. 인터넷과 다녀온 분들 조언의 공통점은 무조건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었다.


등산 배낭 자체가 그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다행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나일론으로 된 1 파운드 정도 무게와 28리터 용량 배낭이 있었다. 삼 파운드 되는 침낭은 부피가 커서 도로 반납하고 돌돌 말면 큰 주먹 두개 정도 되는 홑껍데기로 대치했다. 입고 가는 것 외에 각각 한두 개, 모든 것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화장품과 몇 가지 비상 음식을 넣으니 꽉 찼을 뿐만 아니라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하여튼 나름대로 체력을 키운다고 육 개월 전부터 매일같이 한 시간 동네를 걸었고 팔 힘을 키운다고 10파운드짜리 아령을 겨우 세 번 올리던 것을 다섯 번으로 올려놓았다.


드디어 순례길에 올랐다. 생장 (St. Jean Pied de Port) 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피레네 산맥을 넘기로 했다. 날씨가 나빠서 가려고 했던 코스가 입산 금지가 되었으므로 덜 힘든 길로 가게 되었다. 내 배낭 무게도 만만치 않은데 친구들 것은 더 했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짐들을 다음 도착지까지 택시로 보내기로 했다. 25km를 걸어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몸만 걷는데도 녹초가 되었는데 배낭을 메고 갔다면 큰 일 날 뻔 했다.


그렇다고 매번 짐을 부칠 수는 없었다. 짐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30달라 주고 새로 산 어댑터는 이미 버렸다. 아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두어 개씩 골라 버리기로 했다. 영양제는 반으로 줄이고 변비약은 몇 개만 남겼다. 샴푸 린스 다 버리고 작은 비누 한 개 남겼다. 비누통도 버리고 플라스틱 백에 넣었다. 그것 하나면 머리 감고 샤워하고 속옷도 빨 수 있다. 선탠로션과 잘 때 바를 크림 하나면 되었다. 무게가 주는 만큼 마음도 가벼워진다. 그렇게 버렸으면 가방이 반으로 줄 것 같지만 사실 합쳐 보았자 물 한 병 무게와 부피 정도밖에 안되었다.


걸은 지 삼일 째 되면서 발에 무리가 왔다. 오일 째 되던 날 27km를 걸은 후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불쌍한 새끼발가락 엄지발가락 만해 졌다. 바늘로 따 주고 밴드를 붙여 주었는데 그 옆에 꽈리만한 것이 또 하나 달라붙었다. 유리조각 밟는 것 같다. 발목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오른 쪽 무릎이 발을 뗄 때마다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동안은 여유로 버렸는데 이제는 필수가 되었다. 아까워서 넣었다 뺐다 한 것들, 여벌로 가지고 온 바지, 반바지, 스웨터 과감하게 애착을 끊었다.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브랜드 티셔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중에는 영수증 한 장도 에누리가 없었다. 끝까지 버티던 머리 염색약을 해 치우던 날 얹혔던 음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한편, 가벼워지는 것은 좋지만 가이드북, 시계, 스포츠타올 등 당장 필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정말 아쉬웠다. 사실, 그것이 없어도 된다. 스마트 폰과 신용 카드와 돈만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어디까지 필요하고 없고는 대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걱정하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숲길을 지나 물 넘고 산 건너 들판을 지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절뚝거리며 걸었다. 뒤에 오던 사람들이 다 지나가고 혼자 뒤에 쳐졌다. 내 것보다 두 배나 되는 배낭을 메고 잘들도 걷는다. 그들에게는 손가방 정도 될 작은 나의 짐이 무겁다고 거북이처럼 걷는 나의 모습에 지나가는 달팽이가 다 웃는 것 같다. 오늘은 무엇을 버릴까? 어깨에 짐 뿐만 아니라 마음에 짐도 내려놓는다. 어디로 간다는 것 외에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노란 화살표를 따라 무작정 걷는다.


모양새가 노숙자나 별반 다르게 없다. 땅바닥이 침대고 하늘이 이불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속세적인 생각에 내겐 그래도 순례가 끝나면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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